1906月及

 

MinHo Yu

불편함에 대하여..

 

Alex Yu

27년만의 이사

 

ケン (ken)

가족

 

nuh

끄적거림

 

 


 

 

  

 

MinHo Yu

불편함에 대하여..

 

개인차가 있겠으나 휴대폰으로 글쓰기는 꽤나 불편하다. 큰 남자의 손으로 다닥다닥 붙은 휴대전화 자판을 두드려 긴 길을 쓰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때문인지 지하철에서 간혹 보이는 빠른 손의 소유자들을 보면 약간의 존경심이 들기도 한다.

휴대전화를 사용해 온지20여년 가량이 되었지만 나는 좀처럼 문자 쓰는 일에 익숙해 지지 않았다. 그게 구형 피처폰 이던 신형 터치폰이던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휴대전화로 글을 적는 일 그 자체가 늘지 않았다.

친구들 중에는 학창시절부터 유독 핸드폰 문자에 능숙한 친구들이 많았다. 학교 아침 조회 시간이나 수업 시간에도 책상 서랍 속에 손을 넣어 꼼지락거려가면서 문자를 써냈고 무의식 적으로 전송버튼을 눌러 문자를 보냈다.그들의 대화는 수업 중에도 계속 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여친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연애를 함에 있어 어른이나 애들이나 똑같다는 걸20년 만에 연애를 해보고 나서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되다니 ……

그때는 그 친구들이 압수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왜 그렇게 주머니 안에서 열심히 손을 놀렸는지 이해 하지 못했다.

사람은 누구나 그리고 최대한 편해지려고 노력한다. 그게 내 지론이다. 불편함의 타파야 말로 인류 진보의 역사가 아닐까 싶다.

사람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 그게 사람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앞에서와 같이 불편함을 감수 함으로써 인류는 발전해 왔다.

귀찮아서 연애를 못했다면 인류 멸망 따위는 진작에 왔어야 했고

에디슨은 그 코딱지만한 전구에 불을 켜 보겠다면 죽어라 뺑 이치지 않았어야 맞다.

불편은 그런 것이다. 불편을 편함으로 바꾸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 왔지만 끊임없는 불편함 만이 그 편함에 다다르는 길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인 것이다. 이래서 인생이 모순이다.

2019년6의 어느 날 월급의 마감을 놓치고 급히 서울로 가는 길에 휴대폰으로 글을 쓰자니 귀찮아서 죽겠는 어떤 이의 비겁한 변명을 포장하기 위한 짧은 단상……

 

 


 

 

  

 

Alex Yu

27년만의 이사

 

 

드디어 이사 간다.

한 지역 한 집에서 정말 오래 살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동네 친구 및 지인들은

전부 이 지역을 떠났으며

남은 것 이라고는 그저 오래된 학교와 마트 등

무생물의 건물들 뿐이다.

이런 건물들에도 정이 들었는지

막상 이사날짜가 정해지니 아쉬운 느낌은 든다. (특히 학교)

이제 곧 이사 갈 곳은 지금보다 더욱 더

출근하기에도 멀고 도심에 나오기에도 먼 곳 이지만,

보다 방도 넓고 비행기도 지나다니고 전철 차량기지도 보이고

부모님과도 함께 살 수 있는 내 집이다.

금액적으로는 굉장히 부담스럽긴 하지만

뭐 어찌되었던 잘 살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 속에 이 집에서 쓰는 마지막 월급을 작성하고 있다.

이사 갈 생각만 하면 계속 기분이 묘해진다.

막 좋은 기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분이 나빠질 정도로 섭섭하던가

그런 기분이 아니다.

그저 설명하기 힘든 묘함 속에 이 집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ケン (ken)

가족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생애가 잘 나와 있다. 잘 나온 건 아니다. 어린 시절은 거의 없고30살 전후부터 십자가에 못박히는33살까지 약3년 정도의 기간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있다. 

종교라는 것이 결국 장사라서 사람을 불러 들여 모으지 않으면 유지가 안된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어느 종교든 희망이되고 좋은 말들 아플때 치유가되는 말들만 골라내거나 좋은 쪽으로 외곡하거나… 그런 경우가 많다.

가족에 대해서도 그렇다. 가족제도라는 건 신성한 불문율이다. 그래서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 그걸 건드리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족관념은 철저히 혈연중심이 아니다. 아쉽게도 가족에 대해 본인께서는 그리 좋은 말남기지 않으셨다. 직접 자신은 가족과 불화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시는 장면도 있고, 어머니와 가족이 밖에 찾아왔다고 알리자”누가 내 어머니고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 뜻대로 하는 자들이 내 형제고 어머니다”라고 했다.

설교자들은 신앙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한 일이라는 강조의 의미라고 해설하겠지만(내가 볼 땐 그렇지 않다) 실제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가족의 양상을 보면 우리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비해 유지되기가 쉽지 않은 조직임이 분명하다.

여기 미야자키에 싱글맘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 대부분20대 엄마들이다. 그리고 대부분 남자들이 문제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하지만 가정을 이룬다는 것에 대해 성숙한 의식이 없이 남자를 받아들인 여자아이들도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그뿐인가. 별거만 안했지 상처투성이인 가족들도 많고 현대사회라는 것이 어거지로 가족을 갈라 놓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어제도 놀이방에 딸아이를 대리고 갔다가 우연히 딸아이와 같은 학교 같은 학년 친구를 만났다. 그녀석 어머니도. 전에 왔을 때도 우연히 만났는데 그 때는 아버지와 같이였다. 우리 부부와 같은 외동딸이다. 모모코라는 여자 아이인데 그 아이는 성격이 남자인데다 워낙 들이대는 성격이다. 그게 귀엽다. 엄마도 그랬다. 피는 못속인다. 우리 땔래미 땀까지 닦아주는 일본 아주머니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모모코에게 배 다른 언니가 있다는 사실까지 이야기 하신다. 

사실은 모모코 아빠가 전처가 있었는데 첫 아이를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큰 딸은 고모네 부부가 키웠는데 이제 대학생이고 후쿠오카에 살고 있고 아빠는 가끔 한번씩 본다고 한다. 그리고 아빠는 히로시마 반도체회사에 근무. 한 달에 한 번 미야자키에 오고 엄마는 미야자키에서 미용사, 주1일정도 휴일. 큰 딸이 좀 외롭겠네요 했더니 전혀 그렇지 않단다. 부모라는 건 키워준 부모가 부모라는 것. 다행히 고모네가 좋은 분들이었던 모양이다.

모모코가 말한다.

“우리집 엄청 좁아요. 은우 놀러 와도 놀곳이 없는데. 이히히~”

너무 천진난만 들이대는 녀석이 귀엽다. 옆에 있는 엄마도 모모코도 현실이 우릴 감당 못해 라는 분위기!? 

보기에 그리 안 행복해 보이진 않는 가족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히로시마 후쿠오카 미야자키 뿔뿔이 제각각. 남자 혼자서는 애를 돌보지도 못하는가? 미야자키에서도 싱글맘은 엄청 많지 싱글파파는 거의 본 적 없다. 그리고 처와 딸은 좁은 집구석에 저 멀리 두고 일을 해야하는 현실은?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스스로의 선택인가? 아니면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주말부부 월말부부 필연적인가?

여기서 이제 내 가족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여기 미야자키에 온 이유는 분명하다. 가족과 함께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다. 내 딸을 내가 보기 위해. 내가 하고 싶은대로 살면서 현실에 쫓겨 살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결국 현실은 가혹하고 진정성 따위 알아주지 않는다. 노동없이 땅이 식물을 내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우리 가족도 내 성격 안다. 심지가 곧은 것. 하지만 그럴 수 있는 것은 주위로부터 증거를 찾고 확신을 가지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뭔가가 심각하게 일어나면 그게 신의 섭리고 뜻인 것이다. 이번주에 처음으로 가족이 심각하게 행복해지지 않을 경우 나 혼자 이 생활 고집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리 된다면 비통하고 분하다. 내가 다른 직업으로 성공해보겠다고 도전도 못한단 말인가? 가정을 꾸리고 산다는 이유로 내가 하고 싶은 일도 마음대로 못하는 벌을 받아야 하나? 

 

 


 

 

 

 

nuh

끄적거림

 

 

__이것저것 한다. 무슨 생각으로 무슨 의미로 하는지 모르는 일도 많다. 하지만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소중하다 생각한다. 회사도 다닌다. 목적은 있다. 돈을 주니까. 그래서 다닌다. 다른 이유는 없다. 어떤 일이든 목적은 있으니.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신뢰라는 단어를 붙이기 위해서는 우선 돈 관계를 확실히 해야한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히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것이고. 그 다음 중요한 것은 신뢰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야기하는 모든 것에서 신뢰를 잃는 다면 그것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__방송에서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나에게 전달하는 사람은 언젠가 나의 이야기도 전달하기 때문에 멀리 해야한다고.

 다른 한편으로 생각 해보았다. 지인 중에서는 누군가에 이야기를 할 때 자기는 중심이 되는 그 친구에게도 이야기를 꼭 한다고. 자기 입에서 나온 말 그대로 이야기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간혹 이간질은 아니지만 서로간의 대화 중에서 전달의 방식인지 전달의 요령인지 그런 것이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대화를 나눈 두 사람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처음 시작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게 되면서 생기는 오해들. 두 세번 반복되어 깨지게 되는 신뢰. 앞 에서든 뒤 에서든 이야기를 할 때는 어쨌든 진실되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다음을 기약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