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1편 – 5)

 

1편

양말장수

 

5

 

올해 장마는 소나기의 반복이다. 한두 시간 정도 정말 양동이로 들이붓듯 쏟아지다 멈추고를 반복한다. 그래도 너무 감사하게 주말마다 아슬아슬하게 비가 안 온다.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 나는 사무실 밖 포장도로 한가운데 서서 도로의 끝, 건물 사이 저멀리 보이는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육안으로 확인한다. 흐리지만 산의 윤곽이 보인다. 나는 비가 오더라도 많이 오지는 않을 거라 확신하고 등산 장비를 챙겨 차 트렁크에 넣는다. 아직 여섯 시도 안 된 시각이지만 나는 씻지도 않고 등산복을 챙겨 입고 차를 출발시킨다.

전부터 벼르고 있던 산이 있다. 규슈 중앙의 아소(阿蘇) 분지와 규슈 남단의 지금도 분화 중인 신모에타케(新燃岳)가 있는 에비노 고원, 그 사이에 해발 천오백에서 천칠백 미터 정도의 산들이 다닥다닥 모여있는 산지가 있다. 그 산지의 남동쪽의 한 지류를 이루고 있는 산이다. 등산로 입구 주차장에서부터 산 정상을 지나 일주 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코스인데 여섯 시간 정도 걸린다. 전에 갔을 때 산 정상을 지나는 시점에 배가 아파서 포기하고 올랐던 길로 다시 내려왔었다. 반대편에 유명한 폭포들이 많이 있어 장관인데 보지 못했다.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자 일곱 시가 조금 넘었다. 주차장에 아무도 없다. 역시 이런 날씨에 대중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이런 날씨에는 없다. 오히려 걷기 좋은 날씨임에도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높은 확률 때문에 아무도 도박을 하지 않는다. 웃기다 스스로 폭탄을 안고 있는 존재들이 균형에 그렇게 머무르려 하다니.

오래 등산을 하다 보면 산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재미 중에 하나다. 정말 나쁜 사람들은 산에 오지 않는다. 일본은 특히 등산인구가 한국에 비해 많지 않아 더 그렇다. 오늘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산짐승들과 벗 삼아 등산을 해야 한다. 그 또한 큰 재미다. 전처가 영아를 대리고 한국으로 돌아가버린 직후부터 미친 듯이 등산에 매진하며 붙인 재미다. 한국의 산천에서는 보기 힘든 야생동물들이 너무 많아 나는 그 녀석들을 될 수 있으면 자세히 관찰하고 말도 걸어본다.

커다란 두꺼비가 기어가면 어디까지 가는지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따라가 본다. 사람이 가기 힘든 골짜기 속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그리고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하며 주문을 외기도 한다. 항상 부부가 함께 다니는 족제비 한 쌍을 바라보며 너희 들은 어찌 그리 사이가 좋을 수가 있는지 묻기도 한다. 그들의 털이 얼마나 탐스러운지 모피코트와 전혀 친하지 않은 사십 대 아저씨도 단번에 족제비의 털에 매료된다. 밀렵꾼들을 조금은 이해를 하는 계기가 된다. 누구라도 저들의 털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판다 곰처럼 귀여운 오소리는 앞에 사람이 있건 말건 쉬지 않고 산길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무얼 찾는지 엉금엉금 앞으로 기어 온다. 한참을 그렇게 기어 오다가 이윽고 나와 눈이 마주치면 몸이 순간 얼어버린다. 그렇다고 사슴들처럼 재빠르게 도망치지도 않는다. ‘사람 다니는 길 따라다니며 먹을 걸 찾니’하고 말을 걸면 그제서야 사람의 등산로를 벗어나 인간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느릿느릿 숲으로 들어가 몸을 감추어 버린다. 뱀을 산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막 돌을 던지고 그랬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옆을 지나친다. 산속 개울가 바위에 잠시 앉아 얼굴에 땀을 씻어내고 있으면 바로 옆 바위에 길게 걸쳐 있는 것이 나뭇가지가 아니라 온도조절을 위해 햇볕을 쬐고 있는 뱀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제는 나도 놀라지 않고 그저 뱀을 바라보고 웃는다. 그리고 뱀이 나를 인식하기 전에 내가 먼저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난다. 그 외 엄청나게 다양한 컬러의 도마뱀과 뿔 달린 사슴, 원숭이 등등.

한국의 산천에서 이들을 구경하기 힘들다. 특히 뱀과 도마뱀, 지네 같은 녀석들은 깨끗한 땅이 아니면 절대 살지 않는다. 바퀴벌레, 쥐 같은 녀석들이야 지저분한 도시에서도 인간의 옆에 딱 붙어 살아간다. 인간의 도시문명 자체가 지저분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뱀도 징그럽긴 마찬가지지만 미워할 필요는 없는 녀석들이다. 내가 밟고 있는 땅이 깨끗하다는 증거니까.

분명한 것은 이것들이 힐링이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옆에 같이 등산하는 인간이라는 동물이 있으면 가장 더할 나위 없지만 산짐승이 없는 것보다 이것들이 내 주위에 모습을 드러내주는 것 자체로 힐링이다.

 

그리고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완벽한 균형이다. 산과 산을 집으로 하는 들짐승들. 더함도 덜함도 없이 저마다 주어진 수명을 누리다 죽는다. 인간만 이질적이다.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할 털도 없고 사슴처럼 본능적으로 먹어도 되는 풀과 아닌 풀을 가려낼 능력도 없다. 햇빛에 노출되면 화상을 입는 피부를 가진 동물도 지구상에 인간이 유일하다. 항생제 덕분에 쓸데없이 수명도 늘어나 늙은 몸으로 수십 년을 더 살아야 한다.

나는 트렁크에서 방수력이 뛰어난 등산화를 골라 신고 팔 토시에 장갑을 낀다. 한여름에도 반드시 피부를 가려야 한다. 안 그러면 모기나 독충들의 밥이 된다. 가릴 수 없는 얼굴 부분만 해충 방지 스프레이를 뿌린다. 등산로가 임도로 되어 있어 스패츠는 착용하지 않고 가방에 넣고 길을 나선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검은 뱀 한 마리를 만난다. 굵기가 가운데 손가락만 한 검은 뱀이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곳에서 기어간다. 내가 가까이 가자 근처 바위 밑으로 몸을 숨긴다.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이 년 넘게 이 지역 산은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지만 먹물처럼 검은 뱀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누구는 재수 없다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보통 나뭇가지와 똑같은 색을 띠고 있는 것이 뱀인데 이렇게 특별한 녀석이 나에게 모습을 드러내 준 것을 애써 나쁜 의미로 해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검은 뱀에게 인사를 하고 이십분 정도 길을 가니 노란색 크고 작은 돌들로 포장이 된 임도가 나온다. 그리고 푯말이 있다. 임도의 건설 목적과 뛰어난 자연경관과 폭포의 위용을 설명하는 글이 적혀 있다. 마지막에 연월일이 대정 원년(大正元年 : 대정 천황이 즉위한 해. 1912년) 십일월 육일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에 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뱀이나 두꺼비가 아직도 산에 득실 득실거리는 게 일본 정부의 자연보존의 성과가 아니라 국토가 넓고 지자체 예산이 없어 사람 손이 미치지 못한 결과라는 사실. 대정 시대에 설치한 푯말 밑에 녹이 슬어 화살표도 알아보기 힘든 철판이 하나 달려 있다. 그것조차 적어도 사십 년은 넘은 것으로 보인다. 사람 손길이 미치지 않아 자연보존이 잘 되어 있지만 최근에 정비가 안 된 등산로이고 좀 위험한 곳이 많을 수 있다. 조금 각오를 하고 다시 산길을 나선다.

폭포 오경의 첫 번째 폭포가 떨어지는 개울가 바위에 앉아 등산화를 벋고 이상하게 가려운 발목을 확인하고 경악한다. 피를 빨아먹고 있는 거머리가 세 마리, 다리에 붙어 있는 거머리가 일곱 마리, 바지를 타고 올라와 윗도리 안쪽에 뱃살을 뚫으려 하고 있는 거머리가 한 마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에비노 고원 근처 산에 갔을 때 산 거머리의 위력은 확인한 터라 거머리 자체에 놀라진 않았지만 그 수가 엄청나다. 한 시간 남짓 걸었는데 이 정도면 이건 등산이 아니라 거머리와의 싸움이 될 것이다. 나는 거머리를 손으로 하나하나 떼어내고 가방에서 스패츠를 꺼내 거의 무릎까지 끌어올려 착용한다. 피가 흐르는 곳은 그냥 둔다. 어차피 막아도 계속 흐른다. 거머리가 피만 빨아먹지 나쁜 균을 옮기지는 않는다.

미취학 아동 시절 경상도 산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 때가 생각난다. 어둑어둑 해가 질 때쯤 논에서 돌아오는 할아버지의 발목에는 항상 거머리가 붙어 있었다. 그걸 때서 닭들에게 주면 닭들이 그렇게 잘 먹었다. 다시 부산에 사는 엄마 아빠와 합류하고 수십 년이 지나 일본에 정착하기까지 거머리를 본 적이 없다.

 

나는 다시 산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수시로 발밑을 내려다보고 붙은 거머리를 때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U2’의 곡 ‘레몬(Lemon)’을 흥얼거린다.

 

A man builds a city(사람은 도시를 만든다)

With banks and cathedrals(은행과 교회도 만든다)

A man melts the sand(모래를 녹여)

So he can see the world outside(유리를 만들어 창밖의 세상을 바라본다)

A man makes a car(사람은 자동차를 만들고)

And builds a road to run them on(차가 달릴 도로도 만든다)

A man dreams of leaving(도시를 떠나고 싶어하지만)

But he always stays behind(항상 도시에 남겨질뿐)

 

폭포 오경의 마지막인 칠십삼 미터의 폭포에 다다라 떨어지는 물소리에 나의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생각을 비운다. 그리고 계속 심호흡을 반복한다. 깨끗한 활성화 산소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득 채워지도록. 거머리와 싸워가며 올 가치가 있는 산이고 폭포다.

생각을 다 비워도 전에 만났던 미카의 입술이 떠오른다. 개울물의 흐르는 물소리 같은 미카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그냥 전화라도 해볼까 싶어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열한 시다. 테니스부 학생들과 있을 것이 틀림없다. 비교적 자유로운 시간이겠거니 하지만 어차피 전파가 잡히지 않아 전화고 문자고 보낼 수가 없다.

폭포의 위용을 머릿속에 심어두고 장마가 끝나면 다시 올 것이라 다짐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폭포의 물길을 거슬러 한참을 올라가 더 이상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산의 능선까지 다다른다. 물소리와 함께 거머리도 사라진다. 임도도 끝이 났다. 전에 산행을 포기했던 지점까지 이르렀다. 그 지점을 지나고 나서는 아무 생각 없이 능선 따라 걷기만 한다. 중간에 적당한 곳에서 편의점에서 산 도시락과 바나나를 먹고 빨리 일어서서 다시 길을 나선다. 능선도 숲이 우거져 좋은 경치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주차장까지 내려오니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다. 중간에 헤맨 시간을 감안하면 정확히 여섯 시간 정도 되는 코스다. 다행히 거머리가 파고들었던 자리에 피는 멎어 있다. 나는 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차를 출발시킨다.

 

산지를 벗어날 때쯤 스마트폰 알림음이 요란하게 울린다. 대부분 인터넷 주문 알림이다. 나는 편의점에 차를 대고 주문 현황을 확인한다. 평소 두 배 이상의 일일 주문량이다. 보통 주말 배송은 하지 않지만 일요일 주문분까지 감안할 때 월요일이 너무 힘들 것 같아 가게에서 배송 포장을 좀 해두자고 결정한다.

가게에 도착해 당일 주문 수량 전부 포장을 마치고 박스에 모아둔다. 시간을 보니 다섯 시가 조금 넘었다. 나는 가게에 앉아 밖을 바라본다. 또 오늘 하루가 저물어 간다. 산에서 본 검은 뱀이 생각난다. 혹시나 꿈에 나타나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쁜 징조라 볼 수는 없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노트북을 열어 혹시 저녁 먹을 근사한 식당이 없을까 검색을 한다. 다음에 미카와 저녁을 먹게 되면 같이 갈만한 곳을 미리 물색해 두고 싶은 것도 있고, 낮에 힘을 많이 썼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은 욕구도 있다. 하지만 마땅한 곳이 없다. 조금 배가 고프지만 온천을 먼저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좀 멀지만 유황성분이 많고 수질이 뛰어난 온천을 갈까, 아니면 그저 그런 시내에 있는 온천을 갈까 고민 중에 가게 문밖에 손님이 문을 연다.

 

“실례합니다. 영업하시나요?”

“아, 네네. 합니다, 합니다. 어서 오세요.”

나는 허둥지둥 가게 조명을 다 켜고 금전등록기 전원을 넣는다. 원래 주말은 영업 안 하지만 이렇게 운 좋게 찾아온 손님을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다.

젊은 남자 손님이다. 우리 가게에는 아주 드문 손님이다. 그리고 안면이 있다. 키도 크고 피부도 좋고 얼굴은 전형적인 일본인이라기 보다 몽골인 얼굴에 가깝다.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이마도 호인상으로 넓고 입술이 보기 좋게 두툼하고 양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다. 그냥 봐도 웃는 상이다. 누군지 알지만 나는 그냥 시치미를 때고 있다.

남자는 입술을 조금 오므리며 천천히 양말을 살펴본다. 입술을 오므리고 있으니 인상이 딱딱하다.

“어떤 양말이 가장 좋은 가요?”

“특히 신으시는 양말 있으세요?”

“그냥 구두 안에 신을 만한 평범한 거요.”

“평소에 양복 차림이신가요?”

“아니요. 그냥 캐주얼한.”

“그럼 많이 요란하지 않아도 조금 무늬가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희 양말 질은 아주 좋습니다.”

나는 무늬가 요란하지 않는 남자 양말 몇 개를 골라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 준다. 남자는 조금 보다가 말없이 다른 양말을 쳐다본다. 그래도 가게 주인이 일부러 상대방 생각해서 추천한 것인데 건성으로 쳐다보고 일언반구도 없다. 표정이 경직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흰색 발가락 양말에 손을 댄다.

“이게 와이프가 신고 있는 거랑 똑같은 양말이죠?”

“네? 사모님이 저희 가게에 오신 적이 있나요?”

“네. 제가 키리하라입니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손뼉을 치며 연기를 한다.

“아하~ 키리하라 선생님 남편분이시군요. 이렇게 와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키리하라 선생님한테 신세 많이 지고 있습니다. 저게 좀 비싼 양말인데 학생들 줄 거라고 많이 사 주셔서 송구스러울 정도네요.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전에 잠깐 뵀던 것 같은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봐서 잘 모를 수도 있죠.”

“…”

“가게 제법 유명하더라고요. 인터넷 검색해보니 많이 나오던데요. 라디오 방송도 출연하시고.”

“아니요. 전혀요. 겨우 밥 먹고 사는 정도입니다.”

“멀리 외국까지 와서 한 오륙 년 넘게 사업 이어가시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죠.”

오륙 년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거슬린다. 양말 모으기를 너무 좋아하는 젊은 여성 고객이라면 우리 가게 정보를 자세히 검색해보고 그럴 수 있다. 나는 키리하라가 신고 있는 양말을 쳐다본다. 아무 특징 없는 검은 양말이다.

“고객들이랑 가끔 같이 식사도 하시고 그러시나 봐요?”

“아, 네. 단골분들하고 친해져서 자주 합니다. 여기 위층에 사시는 부부 두 분하고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회식도 하고 그럽니다. 항상 사슴고기 먹으러 가죠.”

키리하라는 기분 나쁘게 피식 웃는다.

“한국 요즘 어때요?”

“뭐가요?”

“다시 독재국가로 돌아간다고 사람들 그러더라고요. 대통령들 전부 감옥 가고 자살하고 민주주의 자체가 안 맞는 국가라고.”

이 새끼가 뭔 개소리를 지껄이나 싶지만 사장이 직접 얼굴 내밀고 장사하는 가게라 나는 순간 감정을 잘 억누르고 웃는 얼굴로 대답한다.

“글쎄요, 정치에 관심도 없고 한국 떠난 지 오래라 잘 모르겠지만 권력 가진 놈들끼리 싸우다 그런 거 아닐까요. 어느 정도는 싸워야 발전도 있는 거고. 일본처럼 한 당이 대대로 계속하면 안정이라는 측면에서는 좋긴 하죠.”

나는 그렇게 뒤를 얼버무린다. 키리하라는 똑같은 발가락 양말 몇 켤레를 이리저리 뒤집고 주무르고 양말 태그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읽어 보더니, 발가락 양말 두 켤레와 내가 추천해 준 보통 양말 세 켤레를 계산대로 가져온다. 포장 다 하고 돈 계산이 끝나고 영수증을 건넬 때까지 아무 말이 없다. 그리고 포장된 양말이 든 비닐봉투를 받고 바로 가게 문을 나선다. 나는 뒤따라 나가 허리를 숙이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다. 키리하라는 말없이 대충 고개만 까딱하고 멀리 가버린다. 키리하라가 떠나고 나자 갑자기 피곤이 몰려온다. 땀범벅이었던 온몸이 다 식었지만 안 씻을 수는 없다. 나는 일부러 멀리 바닷가 호텔에 딸려 있는 수질이 좋은 온천을 택한다.

 

노천탕에서 온몸을 달군 후 탕 밖으로 나와 알몸으로 서서 나무 울타리 너머로 파도 소리만 들리는 바닷가를 바라본다. 오늘 목격한 검은 뱀이 정말 나쁜 징조일까? 한밤중의 수평선도 오늘 본 뱀처럼 검다. 하지만 뱀이 무슨 잘못인가. 내가 산짐승들에게 나쁜 짓을 한 적도 없고 거머리가 내 피를 좀 빨아먹은 거 외에 산짐승들도 나에게 나쁜 짓을 한 적 없다. 그렇게 특정 색깔, 동물, 자연현상 따위를 인간의 종교의식과 결부시키는 행위를 경멸하고, 전쟁 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뒤틀리고 불안정한 짓이라 규정짓는다.

 

다음 편에 계속…